17세기 자크 칼로부터 고야, 도미에, 콜비츠, 루오, 그로스, 리베라, 피카소, 샤갈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광기를 고발하고, 전쟁에 반대하며, 그 끔찍한 참상을 예술로 증언한 화가들의 그림을 다루는 책이다. 전쟁이라는 비극을 근본부터 살펴보며, 그림이 주는 강렬한 직접성과 직관적인 호소력으로 살인의 광기를 고발한다. 아직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을 보며 동시대 인간의 고난을 가슴 아프게 성찰하는 책.
그림으로 꾸는 평화의 꿈
“아기의 탯줄을 또 한 번 끊는 심정이다. 살라고 널 낳았는데 이제 죽으러 가는구나.”
<케테 콜비츠, 1917년 일기>
콜비츠는 아들 페터를 전장에 보내고 이 일기를 썼다.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낸 어머니의 애끓는 아픔,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이 행간에 절절하다. 그녀의 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차대전 때 아들 페터를 잃었는데, 2차대전 때는 손자 한스를 전쟁터에서 잃은 것이다. 살아 생전에 세계 역사상 그 예가 없는 처참한 살육전을 두 번이나 겪은 그녀는, 그 와중에 사지가 찢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전쟁에 반대하는 절규로 유명한 그녀의 석판 포스터 「전쟁은 이제 그만!」은 절박하게 내지르는 비명과도 같은 작품이다.
이 책은 17세기 자크 칼로에서 시작해 고야/도미에/루소/콜비츠/루오/베크만/그로스/허트필드/리베라/시케이로스/피카소/샤갈 등 전쟁에 반대하고 그 끔찍한 참상을 자신의 예술로 증언한 모든 화가들의 그림을 총망라한, ‘반전평화미술’의 결정판이다. 백 마디 말보다 그림 한 장이 충격적으로 '말하는' 전쟁의 실상은 전쟁의 무의미함, 맹목, 광기의 실체가 무엇인지 새삼 생각하게 한다.
인간과 전쟁, 그리고 예술가의 임무
인간의 역사는 한마디로 전쟁의 역사다. 최초 전쟁 후 3,5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전쟁이 없었던 해는 불과 244년에 불과하니, 인류는 갖은 핑계로 서로를 죽이고 파괴하는 데 영일이 없었던 셈이다.
회화는 정복자와 정복전쟁을 찬양하는 우상숭배로 타락하기도 했지만, 전쟁을 고발하고 증언해 민중을 계몽하는 위대한 교사, 예언자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책은 더러운 전쟁으로 잇속을 챙기는 지배자를 조롱하고, 잠든 양심을 깨우며, 전쟁도구로 동원되어 희생당하는 민중을 애도한 대표적인 화가들의 생애와 그들의 작품을 통해 전쟁의 본질과 그것이 가져오는 비참을 웅변한다. 대부분의 화집에 나오는 작품과는 전혀 다르게 그림들은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기는커녕 추하고, 끔찍하고, 슬프고, 소름이 돋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전쟁의 광기를, 화약 연기와 전장의 악취, 흥건한 피와 발기발기 찢긴 육신과 혐오와 슬픔을 어떻게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나무를 심은 사람』에서 장 지오노는 ‘인간은 창조할 때는 신과 같은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신적인 창조력을 우리들 인간은 동료 인간을 죽이는 데 낭비하고 있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가루가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으며, 지금도 파멸의 조짐이 우리 머리 위에 어른거린다. 종말을 예고하는 핵시계는 지금 자정에 근접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시대에 예술이 해야 할 역할, 예술가의 임무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나는 보았다!” ― 전쟁의 참상을 증언한 화가들
17세기 종교전쟁을 증언한 자크 칼로는 오로지 광기로 섬뜩한 집단 처형과 전쟁 시의 약탈을 기다란 시네마스코프 화면에 담았다. 한 세기 후인 18세기의 프란시스코 고야는 전란으로 날샐 틈 없었던 조국 스페인의 실상을 마치 르포처럼 생생하게 전한다. 칼로는 전쟁을 먼 곳에서 망원경으로 보았으나, 고야는 줌 렌즈로 끌어와 눈앞에 두고 생생하게 피 튀기는 전쟁의 실상을 증언한다. 마치 ‘이래도 전쟁이 좋으냐’고 소리치고, 윽박지르는 듯하다.
19세기를 산 도미에는 굴하지 않는 반항아였다. 그는 실로 촌철살인할 통찰력으로 부당한 사회구조에 끊임없이 독설을 퍼부었으며, 마지막까지 지배자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평화의 여신이 긴 칼(전쟁)을 입 속에 넣고 삼키려 하는 그림...은, 불가능한 염원, 부조리한 소망을 말하고 있지만 비장하고 처연하기만 하다. 도미에는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인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을 그렇게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치욕적인 제국주의의 시대를 지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우리는 미술사상 유례없이, 자신의 예술을 온통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바친 케테 콜비츠를 만난다. 그녀는 스스로 “구제받을 길 없는 사람들, 상담도 변호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한 가닥 책임을 다하겠다”고 결심한 선한 사마리아의 여인이자 유일한 ‘어머니화가’였다. 단 몇 줄의 선만으로도 생생하게 감정을 잡아내는 묘사력, 선명한 관점에 더해 자신이 직접 겪은 비극과 슬픔을 감정이입시킨 그녀의 판화들은 특히 압도적인 호소력을 지닌다.
바이마르의 혼란기에 집권한 나치에 대항한 화가들의 작품은 실로 처절하다. 특히 그로스와 허트필드는 독일 군국주의에 절망한 나머지 이름도 영어식으로 바꾸어버렸을 정도였다. 그로스는 “나의 작업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세계가 추악하고 병들었으며, 거짓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한다”고 천명했다. 그는 세밀한 철필로, 예리하게 그어내린 듯한 필선으로, 부르주아의 위선과 타락을 시니컬하게 묘사했으며, 동료인 허트필드는 포토몽타주를 통해 나치의 허황된 야욕과 거짓말과 야만을 맹렬하게 공격해댔다.
스페인시민전쟁은 이상주의의 실험장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 포르투갈의 파시스트 군대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의 반란군에 맞서 전 세계의 노동자, 지식인, 예술가들이 연약한 스페인 공화국을 구원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달려갔다. 여기에는 화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게르니카는 이 시기에 그린 것이다. 루소가 “지구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마을”이라고 예찬했던 게르니카는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야만 행위에 분노한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는 역사상 이에 비교할 만한 작품이 없을만큼 탁월한 반전 반파시즘의 상징이 되었다.
불길에 휩싸인 세상을 그림으로 보여준 샤갈, 상징성 가득한 반전 메시지로 인상 깊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에 이어 20세기 화가들은 핵의 위협에 주목했다. 이제 화가들은 단순히 전쟁이 무익하고 부도덕하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한 멸절, 지구상에 산 것이 더는 존재할 수 없는 파멸을 가져오기 때문에 ‘죽임’에 반대하는 그림을 그린다. 전쟁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죽음에 불과하기 때문에, ‘당연히’ 반대해야겠지만 이젠 더욱더 절박하고 치열하게 반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핵은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파멸시키기 때문이고, 그런 연후에는 예술도, 삶도, 사랑도 무엇도 더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이제 그만!
우리는 2차대전 이후에 일어난 두 번의 국제전에서 무수히 많은 산 목숨을 제물로 바쳤다. 월남전에서는 5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자들도 고엽제의 후유증과 제3세계 민중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댄 어두운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한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또 하나의 전쟁에 말려들어가는 중이다. 전쟁은 악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갖은 명분을 덧붙여 전쟁을 선동하고 직접 총을 쏘는 자들이 있고, 이들에게 혹해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야, 도미에, 콜비츠, 피카소, 샤갈 등의 화가들은 너무나 자명한 전쟁의 비참을 자신의 예술로, 체험으로 증언하고 모두 한 목소리로 외친다. “전쟁은 이제 그만!”이라고.
♧ 저자 소개박홍규
영남대학교 법대를 졸업했고 동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민주주의 법학 연구회 대표이며 우리나라 법 체계의 여러 문제들을 비판한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대상 저작상을 받았다. 한국 아나키즘 학회 대표이며 인문학 전반에 걸친 폭넓은 저술활동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을 비판한 이반 일리히를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했고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등을 번역했다. 저서로는 『카뮈를 위한 변명』(2003), 『카프카-권력에 도전하다』, 『베토벤 평전-갈등의 삶, 초월의 예술』(2003), 『자유인 루쉰-위대한 지식인의 초상』(2002), 『내 친구 빈센트』(2001),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고야』(2002), 『노동단체법-노동법2』(2002) 등이 있다.
여는 글
왜 반전과 평화의 미술인가?
자크 칼로｜전쟁의 비참과 불행
프란시스코 데 고야｜나는 보았고, 내 그림은 비명을 지른다
오노레 도미에｜권력자에게는 비수 같은 풍자, 가난한 자들에게는 연민과 위로
19세기 반전화｜제국주의의 그늘과 치욕
케테 콜비츠｜선한 사마리아의 여인, 인류의 어머니
조르주 루오｜신앙인이자 고통받는 인간, 화가이자 장인
나치와 반전화｜내 조국을 고발한다! 나치와 '퇴폐화가'들
멕시코혁명과 반전화｜인류의 양심에 박힌 가시 스페인시민전쟁을 증언한 화가들
제2차세계대전과 반전화｜예술을 통한 레지스탕스
20세기 후반 반전과 평화의 미술｜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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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저]
법학을 연구하는 법학자이자 인문과 예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쓰는 저술가예요. 영남대학교와 오사카시립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지금은 영남대학교 교양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자유와 자연, 자치의 삶을 실천하려 애쓰며, 인문과 예술의 부활을 꿈꾸면서 다양한 글을 쓰고 있답니다. 지금까지 《자유란 무엇인가》《함석헌과 간디》《사랑수업》《니체는 틀렸다》《인문학의 거짓말》 등을 썼으며, 《간디, 비폭력 저항운동》《자유론》《오리엔탈리즘》《문화와 제국주의》《상식, 인권》 등을 우리말로 옮겼어요. 또 여러 분야의 학자들과 함께 《공부의 즐거움》《거꾸로 생각해 봐! 2》《9인 9색 청소년에게 말 걸기》《무엇이 정의인가》 등을 써서 자유와 인권, 정의에 대해 부지런히 전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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