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수필가인 배인환의 수필 선집. 노 작가의 여정에서 여전히 추억과 의미로 삶아 숨쉬는 추억들이 담긴 글들을 가려 뽑아 엮은 에세이들이다. 젊은 날의 일상과 경험이 어떻게 의미로 구축되는지 그리고 시간 속에서 어떻게 생생하게 복기되는지,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낮의 낮잠과 쓰르라미 소리의 나른한 오후, 먼 데서 우는 수탉들의 긴 울음과 이웃 마을에서 들리는 낯선 사람들을 향한 개들의 두어 마디 멍멍 소리, 황혼녘에 홀로 서 있는 원두막의 고즈넉함.”
이 책은 이제는 사라져버린 고향에 대한 추억부터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남겨진 난꽃에 이르기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잃고 얻은 수많은 것들이 세심하고 따뜻한 손길로 정리되어 있는 글들이다. 때로는 치열했고, 가끔은 방황했던 한 일생을 정리하는 담담한 이야기들이다. 그저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 부족했던 제자에서 누군가의 스승이 된 한 일생의 과거와 현재가 마치 한 편의 일기처럼, 때로는 편지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다.
“모처럼 친구를 만나면 주변을 정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통장도 하나만 남기고 전부 없앴고, 사진도 거의 없애 버렸다.”
철없던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세상과 짧고 즉흥적인 여행에서의 풍경, 평범하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에 대한 고마움과 사소한 것에서 발견하는 작고 소중한 추억. 특별할 게 없을 이 짧지만 긴 하나하나의 사연들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평범한 타인의 은은한 삶의 잔향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며 어느새 잊어버렸거나, 혹은 구태여 찾아보려 하지 않았던 아름답고 특별한 추억들이 다시금 떠오르는 것이다.
추억을 정리한다는 것은 다시 생각하며 의미를 재구조화하는 것이다. 언제든 꺼내어 볼 수 있게, 그래서 언젠가 천천히 그리고 깊게 되돌아볼 수 있도록 소중히 보관하는 일이다.
투박하지만 따뜻함이 감돌고 있는 평범한 사람의 추억이 정리된 글을 읽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잠들어 있는 소소하지만 깊었던 과거의 추억을 되짚어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선물해줄 것이다.
작가의 말
1부 겨울에 대하여
그리운 내 고향
새내의 추억
나의 청소년 시절
FM과 나의 가족
미수 잔치
겨울에 대하여
짧지만 긴 사연의 편지
제자의 내방
차와 술
집 순례
2부 아내의 먼 여행
아내의 먼 여행
마리안느
호수 같은 선생님
풀벌레 소리
하얀 집
이장
아버지의 친구
가을 밤
마중
질현성
산직리산성
오동나무꽃 향기
3부 아버지의 원두막
아버지의 원두막
어머니의 유품
그 집
말, 이 신비한 주술
엽차 한 잔
딸꾹질
베란다의 백합꽃
깅코에 대한 추억
〈변신〉의 작가 카프카
4부 학 마을 기행
일본 나무 시비
송추 기행
보길도 기행
임희재 선생 추모 문학제
학 마을 기행 1 - 동경
학 마을 기행 3 - 별 헤는 밤
수석 이야기 3
수석 이야기 5
유년의 살구나무
5부 추억 속의 강경 젓갈 여행
베란다의 난꽃
추억 속의 강경 젓갈 여행
생명의 신비
천내강변 1
천내강변 2
고물 시계
부처님 마음
바람 뚫고 파도 넘어 찾아간 섬, 독도
손자와 같이 떠난 일본 여행
손녀 서린이
엄마의 마지막 산 - K2
아차산성
다시 오른 계족산성
전원에서
‘전원에서’ 띄우는 편지
이제는 편지를 쓰지 않는다. 편지를 쓸 대상도 많이 없어졌다. 마땅한 대상이 없는 만큼 나의 편지는 대상 없이 쓰는 시 한 편, 수필 한 편이 되고 말았다. 짧은 시, 짧은 수필.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볼 때는 긴 사연의 편지를 수시로 띄워 보낸다. 물론 답장은 없다. 그래도 좋다. 종이배를 접어 이별을 실어 먼 바다로 띄워 보내는 심정으로 나는 이런 편지를 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 쓸 것이다. - p. 43
어느새 세월이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 연륜만큼이나 뚜렷한 흔적을 남겨 놓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많이 희었다. 아내도 여자로서의 자신을 추스르느라고 무척 애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하나씩 무너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 p. 204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꽃을 피워 주는 난을 보면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나를 챙겨 주지 않는다고 불평한 일은 없었는가? 내 보잘것없는 글을 읽어 주지 않는다고 투덜댄 일은 없었는가? - p. 228
배인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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