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예술』제1권《나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선두 그룹인 ‘현실과 발언’ 동인에 참여한 유일한 사진작가 정동석의 작품세계를 조명한 작품집이다. 정동석의 사진작품 96점과 그의 사진세계를 윤구병, 박찬경, 박영택, 최건수 등 철학자에서 작가, 미술평론가, 사진평론가까지 모두 8명이 다각도로 쓴 11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요지>
“이제 기다렸던 사진예술가 한 사람이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라고 말문을 열어야 할까 봅니다……어지간히 양심을 팔지 않는 한 자신의 예술로만 밥을 먹기에 여전히 어려운 이 토양에서 삶과 예술의 일관성을 지켜내며 꿋꿋한 자존의 길을 걸어온 한 사진가 말입니다.”
미술평론가 정진국 씨가 사진가 정동석을 평하면서 한 말이다.
‘현실과 발언’에 참여한 유일한 사진작가로 분단풍경(반풍경)으로 잘 알려진 사진가 정동석의 작품세계를 조명한 작품집이다. 정동석의 사진작품 96점과 그의 사진세계를 윤구병, 박찬경, 박영택, 최건수 등 철학자에서 작가, 미술평론가, 사진평론가까지 모두 8명이 다각도로 쓴 11편의 글이 수록됐다. ‘무제-서울에서’에서 ‘가득 빈’까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작가가 사진을 찍은 연대기 순으로 작품과 글을 배열해 작품의 이해를 돕는 형식이다. 이 중 ‘무제-서울에서’와 ‘서울묵상’ ‘가득 빈’은 지금까지 발표되지 않은 사진으로 이 책을 통해 처음 발표되는 것이다. 초기 작업이 민주화와 분단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면 중기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산, 들, 내, 바다의 풍경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대등한 생명체로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후기에는 모든 것이 지워진 채 검거나 흰 바탕에 네온사인의 한줄기만 반짝이는 작업을 선보여 보이지 않는 곳의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거나 가진 것을 모두 덜어내고 비우려는 작가의 맘을 엿보게 한다. 뒤로 갈수록 작업은 사진을 벗어나 간결한 ‘추상화’로 변해간다.
<내용>
정동석의 작품은 크게 6시기로 대별할 수 있는데 그 시기가 곧 이 책의 목차가 된다.
초창기 작업인 1장 1982년 ‘무제-서울에서’라는 작품은 지금은 없어진 광화문의 국정홍보판을 찍은 여섯 컷의 흑백사진이다. 파노라마처럼 사진이 펼쳐지는데, 5.18 광주민주항쟁의 메시지를 이렇게 간명하게 보여주기도 어려울 것 같다. 이 작품은 원래 ‘현실과 발언’ 전시회에 출품하려던 것이었으나 워낙 무서웠던 시절이라 일반에게 공개할 수 없었던 것으로 이번에 처음 발표되는 것이다.
책의 2장 반反풍경과 3장 신미辛未에서 경진庚辰까지는 사진가 정동석을 일반인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 문제작들이다. 독도를 수비하는 장승과 주변 풍경, 군인 초소, 해안가의 철조망과 나무막대기, 대전차 장애물 등의 ‘반풍경’ 사진은 분단 문제를 처음 사진으로 제기한 선구적인 작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살벌한 분위기로 다가와야 마땅한 이런 군사시설은 정동석의 눈을 거치면서 이데올로기나 긴장이 해체된 채 아름다움마저 느껴지는 한 폭의 풍경화(?)로 변한다.
“정동석의 1980년대 사진에서 특이하고도 흥미로운 점은 그의 사진 안에서, 초소나 철조망 같은 설치물들은 대단한 위엄을 지녔다거나 강력한 물리적 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특히 롱샷으로 잡힌 철조망이나 해안 경비를 위한 울타리들은 수평선과 나란히 하늘과 땅을 가르면서 그저 담담하게 거기에 놓여있을 뿐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 대상들이 실제로 얼마만한 군사적 가치를 지닐까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진다......정동석이 이 시설들을 가공할 만한 군사적 긴장을 보여주고자 포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시설로부터의 거리감을 강조하고 있다”(박찬경의 ‘정동석의 반-풍경, 반-광경’에서)
신미辛未에서 경진庚辰까지는 들판으로 산으로 내로 강으로 바다로 10년간 다니면서 얻은 결과물이다. 작가는 “배추는 배추끼리, 잡초는 잡초끼리 또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자라는 것인... 줄로만 알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보통 생각들 하고 있다. 허나 배추와 잡초, 벼와 피는 선의의 경쟁을 하며, 때로는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는 더 예쁘고 더 미움이 없다! 10월경 한창 크는 배추밭에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랐고, 벼가 알알이 무르익어 고개를 숙일 무렵 논에는 벼와 하얀 꽃의 잡풀이 보기 좋게 어우러져 있다. 농사꾼들에게 잡풀은 마땅히 제거해야 할 것이지만 작가는 같이 살아가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민둥산이었다가 다시 파머 머리처럼 오글오글 올라오는 작은 나무들, 거둘 때가 이미 지나 만지기만 해도 알이 튀어 나올 것 같은 콩꼬투리, 돌밭을 일궈 심어놓은 들깨 모, 호된 제초제의 홍역에도 살아남아 푸르고 붉은 꽃을 피우는 들풀들, 폭설이 내렸는데도 여전히 붉은고추가 그대로 달려있는 고추밭 같은 작품은 애써 작품을 읽어내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땅이 버려지고, 제초제로 지탱하고, 어떻게 곡식을 심었더라도 거둘 힘마저 없는 노인네들만 사는 우리의 농촌의 현실을 조용히 제시하고 있다.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질적으로 다른 이 ‘철’을 내면화하는 과정을 일러 ‘철이 든다’고 한다. 철에 따라 삶의 과정을 제 힘으로 조절하고 통제하는 동안 봄철에 풀과 나무에서 새순이 나듯이 사람도 ‘철이 난다.’ 시간을 내면화할 수 없는 사람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없다(이것은 다른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철이 없거나,’ ‘철모르는’ 사람이 ‘철이 들어’, ‘철 있는’ 사람에게 기대지 않으면 살아남을 길이 없다. ‘철없는’ 도시에서 ‘철모르고’ 사는 도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생체구조의 유지와 생명의 존속을 위해서 ‘철들고’, ‘철난’ 생명체에 몸을 기대야 한다. 기댐의 형태는 다르다. 기생일 수도 있고, 착취일 수도 있다.” (윤구병의 ‘상류에서 하류로, 시간의 중심축으로’에서)
“애써 일구어 놓은 밭에 어거지로 다시 꽂힌 소나무(그나마 반 이상이 죽어가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허옇게 차일을 친 망초 떼, 어찌어찌해서 마지막까지 지켜보려고 하지만 이내 허연 배를 드러내 씨앗을 뿌릴 의욕마저 앗아가는 한 뼘의 땅, 그 뒤로 저 멀리서 떼 지어 내려오는 망초, 망초들.
어찌 정동석의 사진이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어찌 그 사진 읽기가 느긋하고 마음 편할 수 있겠는가? ‘살림’은 이렇게 ‘상류에서’부터 거덜나고 있다.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연의 생명력과 인간의 생명력이 상승 작용하여 공생의 넉넉한 삶터를 가꾸어 내지 못하게 하는 이 악순환의 고리는 어디에서 발원하여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가?“ (윤구병의 ‘상류에서 하류로, 시간의 중심축으로’에서)
4장 ‘서울묵상’은 20년 가까이 시골생활을 하면서-인천의 계양산, 의왕의 청계산, 양주의 묘적산, 횡성의 덕고산-작업을 해왔던 작가가 서울로 올라와 시작한 작업이다. “목쉰 새 서울에 산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인간들의 손에 잘리어진 나무들, 그럼에도 꽃을 피우는 도로변의 꽃밭을 보면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잘 살도록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 같다. 푸른 하늘에 가지가 잘린 채 서 있는 나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5장 ‘밤의 꿈’은 작가가 작업을 위해 3년간 택시운전을 하면서 잡아낸 도시의 야경, 그중에서도 도시의 네온사인이다. 붉은 직선이나 사선 그리고 직선으로 대칭되어 있는 달, 여러 가지 상징기호 같은 선들이 까만 바탕에 드러난다. 사진평론가 최봉림은 “미니멀 아트의 작품처럼 냉정하고 엄격하게, 그러나 화려하게 빛난다. 이것은 분명 하찮고 치졸한 밤의 ‘장광설’조차 생명의 활기로, 삶의 열정으로 이해하는 작가의 포용력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6장 ‘가득 빈’ 은 ‘밤의 꿈’과 이어져 있는 작품들이다. 까맣거나 하얀 바탕에 드러나는 선線은 아름답고 지극히 회화적이다.
“아마 그 세계는 어떤 이념도 풍화되고, 얽매임도 없는 자유스러운 세계가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갈아엎는 정토, 아마도 미륵의 세계를 닮은 정토를 사진가는 서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건수의 ‘가득 빈, 그리고’에서)
독보獨步 _ 하종오
정동석의 反-풍경, 反-광경 _ 박찬경
삶과 자연의 융합 _ 최건수
상류에서 _ 정진국
상류에서 하류로, 시간의 중심축으로 _ 윤구병
보행명상, 소요하고 명상하며 찍은 자연 _ 박영택
실학의 사진, 인간과 자연의 부조화, 그 흔적을 포착하는 힘 _ 김상수
도시 공간 속 자연 _ 박영택
밤과 도시의 상형문자 _ 최봉림
네온으로 그려진 밤풍경 _ 박영택
한국사진의 영원한 아웃사이더 _ 진동선
가득 빈, 그리고 _ 최건수
작가연보
도판목록
정동석 [저]
1980년대 민중미술의 선두 그룹인 '현실과 발언' 동인에 참여한 유일한 사진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1983년에서 1989년에 걸친 '반풍경'에 이어 1991년부터 2000년까지 '신미에서 경진까지'를 선보였는바 이 작업은 10년간 들과 산, 내 그리고 바다로 이어지며, 우리 삶을 흔한 풍경을 통해 보여준다. 이후 2001년작 '서울묵상'으로 도시 속에서의 인간과 자연의 생태적 융화를 이루려는 풍경을 선보였고, 2002년부터 2005년까지의 '밤의 꿈'을 통해 도시의 밤풍경으로 우리 삶의 변화를 꿈꾸는 작업을 내놓은 바 있다. 이어 2006년부터 세상 사람들 속에 있는 본래의 밝음을 찾아 '가득 빈' 시리즈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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