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끄시는 길 따라』는 고령화 문제에 관한 논의가 한창인 요즘, 이제 막 노인의 대열에 합류한 어느 수도자의 질박한 성찰록이다. 노년의 삶과 나이 들어가는 수도자들의 삶을 바라보는 개인적 상념과 묵상, 자신의 40년 수도생활을 돌아본 소회를 담담히 밝힌다.
“나는 당신 손안의 진흙 공,
마음대로 굴리십시오!”
수도원 뜨락에서 번져 나오는 나지막한 성찰의 기도
오랜 세월 한결같이 강의와 저술과 번역에 매진해 온 저자 정하돈 수녀가 어느덧 노년에 이른 자기 자신과 동료 수도자들, 반세기에 걸친 자신의 수도 여정에 대한 소회를 담담히 적어 내려간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에게서 신앙과 일상이 나뉘지 않은 삶의 모범을 배우고 익힌 저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수녀원에 입회한다. 그리고 청원자 신분으로 떠나게 된 독일 유학의 길. 그로부터 네 차례에 걸친 17년간의 타국 생활 동안 저자는 고독과 외로움, 실망과 좌절을 맛보기도 하고 때로는 막막한 어둠 속에 머물면서도, 한 줄기 빛과 바람으로 함께하시며 언제나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의지하여 한 발 한 발 수도자의 길을 묵묵히 나아간다.
제1장에서는, 이제 노년을 맞이한 저자 자신과 친구들, 은퇴 사제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생의 뜨거운 한 시절을 무사히 통과한 이들이 느끼는 보람과 회한, 또 그로부터 솟아나는 새로운 희망과 열정을 전해 준다. 제2장에서는 유학으로 인한 오랜 타향살이를 배경으로, 자신과의 영적 투쟁,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에서 겪게 되는 시련과 그에 따른 내적 고뇌 및 치유의 은총을 절절히 펼쳐 보인다. 제3장에서는 수도생활이라는 특별한 삶의 형태 속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화해, 용서와 관련한 자신의 다양한 체험을 진솔히 고백하며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겨 드리는 겸양의 자세를 보여 주고, 마지막으로 제4장에서는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추억과 사랑하는 가족 또는 친구와 관련한 에피소드, 그리고 언젠가 돌아갈 영원한 집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수도생활에서 맛본 기쁨과 영광은 물론, 어쩌면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을 시련과 상처, 부끄러움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털어놓으면서 저자는 말한다. 헤아릴 수 없는 약점과 허물과 실수로 얼룩진 삶이었지만 세상도 그 누구도 줄 수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 속에서 나날이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그리고 기나긴 여정에 언제나 곁에 계시며 자신의 삶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사랑에 대한 감사와 찬미로 글을 마무리한다.
수도자와 평신도를 막론하고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이들, 그리고 지금 노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차분히 읽어 볼 만하다.
들어가면서
제1장 노년, 내 인생의 황금기
가을 풍경
50년 만의 동창회
노인 사제들
백 살이 된 원산 아가씨
귀천
몽당연필
제2장 고독 속에 숨은 삶
낙제생
저는 죄인입니다
수비아코
삶의 역사, 신앙의 역사
공을 만들었어요
떠나라!
존재 자체로 귀하다
제3장 그리스도, 나의 전부
예수님, 거기 앉아 계셔요
이기적인 수녀
명약
자유로운 비상
기러기 이야기
나를 이끄시는 분
제4장 내 집은 어디인가
죽마고우
꿈이 이루어지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내 집은 어디인가
위대한 유산
맺으면서
새 연필이 긴 세월 동안 닳고 닳아 몽당연필이 되기까지 연필 주인의 손길과 쓰임을 많이 받았다. 때로는 부러지기도 하고 심이 제대로 박히지 않아 글씨가 잘 쓰이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연필로서 사랑받고 고루고루 잘 쓰였음에 기뻐하며 감사한다. 몽당연필은 이제 도구로서 할 바를 다했다. 그것으로 족하다. 주인이 더 이상 쓰지 않는다고 해서 연필 입장에서 아쉬워하거나 화를 낼 수도 없고, 달리 무슨 수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연필은 어디까지나 연필이요 도구일 따름이니 …(45쪽).
버리면 버릴수록 나는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정작 버려야 할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나의 의존과 갈망, 집착, 소유욕이다. 아울러 놓아 버려야 할 것은 내 인생에서 의미 있고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집착이다(141쪽).
수녀원에 들어올 때 아버지 신부님께서 주신 작은 상본에는 “안나야, 부활의 영광에는 십자가의 치욕이 먼저 있어야 했다”라는 말씀이 적혀 있다. 수십 년간 성무일도서에 끼워 놓아 색이 바랜 이 상본을 요즘도 날마다 들여다본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부활의 기쁨과 진리를 머리가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려면 때로는 부서지는 듯한 아픔의 순간들을 인내하고 견뎌야만 한다(178쪽).
정하돈 [저]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수녀. 독일 아이히슈테트 대학교 종교교육학과를 졸업하고(1969) 종신서원(1977) 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편수위원을 지냈다. 독일 뮌스터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 취득(1985) 후 교리신학원 강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으며, 수도자들의 피정과 세미나 지도 및 강의, 본당 전교, 분원장, 대구 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부 전임강사 등으로 활동했다. 현재 본원에 거주하며 강의와 번역에 전념하고 있다. [나의 신앙고백]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행복한 사람들] [주님의 종이오니] [일 분 교리] 등을 짓고, [하늘은 네 안에서부터] [부활의 기쁨 100배 맛보기] [마리아는 우리에게 누구이신가] [안셀름 그륀의 베네딕도 이야기]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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