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 그늘에 한번만이라도 앉거나 누워보십시오. 굳이 고향 느티나무 그늘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모든 느티나무는 형제거든요. 아니 이웃사촌의 너른 가슴과 아량을 지녀서 누구든 밀어내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서늘한 그늘뿐이지만 그 밑에 가면 잃어버린 것들과 꿈꾸어야 할것들이 있습니다."
느티나무 그늘 밑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야기
이룸의 테마 기획 '한국의 뿌리' 시리즈 두 번째 권으로 정동주 시인의《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이 출간되었다. 이 시리즈의 앞선 작품《어머니의 전설》에서 한국 어머니의 일상을 뭉클한 감동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은 저자는 이번 작품에서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느티나무 그늘 밑의 사라져가는 한국인의 풍경을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로 형상화하고 있다.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은 마을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건 볼 수 있었던 한 그루 느티나무를 통해, 느티나무에 얽힌 사연, 느티나무가 마을에서 갖는 상징성, 느티나무 아래에서 행해졌던 마을 공동 의식 등 느티나무를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무궁무진하게 펼쳐진다. 더불어 천 년을 예사로 사는 느티나무와 함께 세상의 희로애락을 겪어왔던 우리 조상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그대로 묻어 있다. 사진작가가 찍은 각 지방의 느티나무 100여 컷과 설명을 곁들여 읽는 맛이 한층 생생하게 전해진다.
순박한 농투성이의 농심을 먹고 자라는 느티나무
농촌 사회에서 느티나무는 마을 사람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었다. 느티나무는 사람들이 가족의 건강과 장수를 비는 신성한 나무였고, 시원한 느티나무 그늘은 농부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해주었으며, 느티나무 잎이 돋는 모양새를 보고 사람들은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 또한 느티나무 그늘은 부모를 농사일에 뺏긴 아이들이 마을 어르신 밑에서 천자문을 배우고 한글을 떼는 서당이 되어주었으며,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지금과 같은 의사당이자 민주광장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느티나무와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느티나무를 베거나 가지를 꺾는 사람들은 술 한 동이를 내야 한다는 규칙까지 만들어 느티나무를 보호했다. 한없이 너른 어머니의 품을 연상시키는 느티나무는 때로는 왜병을 피해 도망쳐온 처녀의 몸을 숨겨주었으며, 때로는 잠잘 곳 없는 거지나 부랑자에게 바람을 막아주는 따뜻한 침소가 되어주었다.
하늘의 신이 항상 인간과 마을을 보살펴주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준 나무를 당산나무라 하는데, 느티나무는 '느티 당산' 즉 '신수(神樹)'라 불린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나무이다. 동네 어귀에 서 있는 몇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제를 모시고 음식을 골고루 나눠 먹는 일은 농촌의 빼놓을 수 없는 큰 행사였다. 또한 당산나무나 서낭당을 지나칠 때는 부릅뜬 장승의 눈망울이나 솟대 끝의 기러기가 왈칵 무섬증으로 다가오던 것도 당산나무가 갖는 이러한 신성성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 일에 간섭하고 자리를 내주고 농사일을 거드는 느티나무는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되는 보통의 나무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무엇보다도 그 마을을 상징하는 신성한 힘을 가진 나무로 자리 잡았다.
마을의 자치 기구이자 의회 건물로서의 느티나무
이 책에는 우리 민족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가 소개돼 있다.
60㎏이 나가는 들돌을 어깨 너머로 들어 던지면 성년임을 인정받게 되는 '들돌 들기'(본문 <느티나무와 민속> 69쪽 사진 참조)라는 놀이가 있었는데, 이 의식을 통과한 청년들은 성인으로 인정받아 어른과 동등한 품을 팔 수 있게 되었다. 느티나무 밑에서 이뤄졌던 동제 의식 때는 음식이 쉬 상하지 않는 물기가 없는 음식만을 장만하는데, 이것은 음식을 먹기 위해 이날 마을을 찾아오는 거지나 배곯는 자를 위한 마을 사람들의 뜻 깊은 배려이다.
마을 주민 전체가 함께 행동해야 하는 부...역, 혼례와 상례 때의 상호 부조, 효행한 사람의 표창, 불효자나 마을에 과오를 저지른 자에 대한 징벌 등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의논을 나누고 다수결에 따라 결정을 짓는 대동회의도 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행해졌다. 이때 느티나무는 마을의 자치 기구이자 마을의회의 역할을 했다. 서구 사회에서 발달한 의회 민주주의가 도입되기 훨씬 전부터 우리나라 농촌은 완전한 형태의 기능을 지닌 의회 민주주의를 창안하여 실천해온 셈이다. 이때의 의회 건물이 곧 마을의 느티나무 당산이었음은 제정일치의 유구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쓰여진 부침의 느티나무 역사
사람이 사는 마을에는 어김없이 느티나무가 있다.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 마을을 만든 것이 아니라 마을을 위하여 느티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산과 강물, 들판과 바다, 땅속과 하늘을 자르고 죽여서 만든 이익과 편리에 의해 자연이 제물로 바쳐지기 전에는 마을마다 느티나무 없는 마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시작되고부터 느티나무는 거치적거리는 존재로 전락해 베어지고, 더 이상 심지 않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일제시대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 느티나무 밑에서 단결하고 힘을 모으는 것을 못하게 하는 동시에 마을의 상징인 이 느티나무를 베어 없애버리기까지 했다. 한국인의 마음을 적시고 살찌우던 원천이 고갈되면 영혼은 황무지처럼 메마르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듯 느티나무는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의 뿌리 깊은 민족적 자존심으로 살아 있으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담당하는 나무로 자리 잡고 있다.
느티나무 잎에서 피어나는 잃어버린 시간
마을 사람들이 느티나무에 부여한 지극한 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짧은 에피소드도 이 책에 소개돼 있다. 지금의 LG 그룹이 수원으로 이주하게 되었을 때 이곳에 공장을 짓게 되자 사람들은 강제로 타지로 떠나야 했는데, 그때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뿌리나 다름없는 느티나무를 베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마을 사람들이 느티나무에 부여한 애틋한 마음을 전해 받은 LG 그룹은 그 같은 약속을 지켜 공장을 짓는 동안 뿌리를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느티나무 한 그루를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지금도 뿔뿔이 흩어져 살던 사람들은 정월 초에 이곳에 모여 동제를 지내고 1년 동안 떠나 있었던 고향에 와서 잠깐이나마 향수에 젖는다. 지금의 LG는 느티나무를 그룹의 상징물로 삼고 있으며, 그룹 홍보지 이름도 <느티나무>이다.
기업의 상징이 된 느티나무는 추상화된 나무 우상으로서가 아니라 한국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느티나무의 친근함, 넓게 그늘을 드리워주는 고마움, 많은 것을 쓸어안고 위해 주는 넉넉함, 사시사철 변화된 모습으로 늘 새로움을 깨닫게 하는 창조적 이미지 등이 복합적으로 아우러진 매우 성공적인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소개
지은이 정동주
시집《농투산이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하여, 장시〈순례자〉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서사시집 《논개》를 비롯해 일곱 권의 시집을 펴낸 뒤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대하소설《백정》《단야》《민적》, 장편소설《콰이강의 다리》《신의 지팡이》《불의 지문》등이 있고, 역사자료집 《까레이스끼 또 하나의 민족사》, 평전 《논개》, 오페라《조선의 사랑, 논개》, 민족극《진양살풀이》가 있다.《소나무》《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을 출간하였으며, 계속해서 한국의 문화 및 한국인의 정체성 연구와 집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신의 지팡이》《까레이스끼 또 하나의 민족사》《논개》등은 일본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주요 논문으로〈민속과 한국의 색채 연구〉〈조선천민제도연구-백정을 중심으로〉가 있다. 이룸의 한국의 뿌리 시리즈 첫 번째 권으로 《어머니의 전설》을 출간했다.
사진 윤병삼
1956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경남대학교 산업대학원을 수료했다. '화왕산의 사계', '자연이 숨쉬는 산'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한국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원으로 촬영을 담당했다. 대한민국 국민포장, 대한민국사진대전 대상, 한국 사진문화상 작품상, 경상남도 사진문화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에베레스트》《자연이 숨쉬는 산》 등이 있다.
서문...5
전설의 시원을 찾아서...11
하늘 마당에서 꾼 꿈...29
느티나무와 민속...49
느티마무 숲에서 자란 역사...107
느티나무 그늘로 살아있는 이름...155
잃어버린 시간을 위하여...191
다시 느티나무 밑에서...247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목록...256
참고 문헌...271
정동주 [저]
1948년 경남 진양에서 태어났다. 장편시 [순례자], 서사시 [논개]를 비롯해 대하소설 [백정] [단야] [민적], 장편소설 [콰이강의 다리] 등 40여 권의 시집과 소설집을 발표했다. 마당굿 [진양살풀이]와 오페라 [조선의 사랑 논개]의 대본을 집필했다. 1990년 초부터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여 [카레이스끼 또 하나의 민족사] [부처, 통곡하다] [어머니의 전설 ] [늘 푸른 소나무]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 [장계향 조선의 큰어머니] 등 역사·종교 분야를 읽고 썼다. 1990년 중반 이후 한국·중국·일본의 차문화를 비교하여 한국 차문화의 독자성을 세우기 위한 비교차문화론 연구와 강의를 시작했다. 2013년 ‘차살림학’을 정립하여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한국 차살림] [한국인과 차 ] [우리시대 찻그릇은 무엇인가] [차우림이에 담긴 한중일의 차 문화사] [조선 막사발과 이도다완] [차와 차살림] 등 차와 도자기 문화에 관한 비평적 연구의 성과물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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