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 곤충 시집. 우리나라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섬 사람의 고독은 물론이요 곤충의 고독, 심지어는 야생화의 고독까지 시로 써내는 저자의 시 130여 편을 수록했다. <매연이 쏟아지는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던 개미가 승용차를 몰고 가는 스님을 보고 웃는다 구도는 걸어서 얻는 것인데 가다가 길이 없으면 차를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 운전하는 스님(개미) 중에서
[개미와 베짱이]는 평생을 섬으로 떠돌면서 섬에 대한 시를 써온 이생진 시인의 곤충시집이다. 섬에서의 첫 만남은 곤충이다. 섬은 곤충에서 시작한다. 곤충에 대한 시인의 따뜻하고 애정어린 호흡이 꾸밈없이 담겨있다.
외딴 섬에서 마지막까지 고독을 지켜가는 생명은 곤충밖에 없다는 관점에서 곤충은 그의 외로움을 달래는 유일한 벗이기도 하다. 도시 인근에서 사라진 곤충이 멀리 떨어진 섬에 와 있다는 것은 그에게 커다란 위안이었다.
그는 곤충을 만나면 입이 열렸다. 그리고 곤충의 입장에서 혹은 사람의 입장에서 서로 비교하며 시를 썼다. 이번에 곤충 시를 총망라하듯 전에 썼던 것과 합쳐서 135편의 시를 묶어 [개미와 베짱이]시집으로 묶었다.
그가 자연의 종점인 외딴 섬에서 곤충을 만났을 때, 그는 곤충을 곤충으로 보지 않고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며 시적 대화를 놓치지 않았다. 곤충의 짝짓기에서 부화, 성충으로의 성장,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예리한 눈으로 보고 느낀 이야기가 곤충의 일대기는 물론이요, 생성과정에서의 공통된 인간의 모습과 마주보는 이야기는 울다가 웃다가하게 만든다.
시집에서 우리는 사과속의 벌레를 볼 수 있고, 바닷가에 살아 떼지어 다니는 갯강구를 만날 수 있다. 몸에 독이 있지만 고독하게 살 줄 아는 지네가 있고 푸른 잎을 갉아먹는 배추벌레를 만날 수 있다. '개미와 베짱이'는 우리가 어릴 적 듣던 동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읽어가노라면 자연섭리에 따라 살아가는 곤충의 지혜에 탄복하게 되고 나 스스로를 곤충의 잣대로 측정하여 나(인간)를 돌이켜보게 한다. 다분히 해학적이면서도 인간의 머리로는 따라갈 수 없는 곤충만의 슬기와 지혜를 꺼내 보인다.
가령 우리가 더러워서 피하는 파리를 살펴봐도 파리의 생태가 더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짧은 글 속에서 가시처럼 찌르는 것이 있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얼굴에 침을 배앝 듯하는 부끄러움을 자아내게 한다.
똥에서 교미하고
똥에서 새끼 낳고
똥보고 키워 달라하고
또 똥을 찾아 날아가는 파리
똥 같은 세상에서
똥처럼 살아서 행복한 놈
암컷은 신선한 똥 속에 새끼를 낳았으면 하고
좋은 똥, 웃기는 소리다
그러나 그들은 똥의 성질을 잘 안다
암컷은 여러 마리의 수컷과 복식으로 교미하는 수가 있다
교미는 그들의 자유요 평화니까
하지만 앞의 정자를 끄집어내고 자기 정자를 집어넣는 수컷의 지혜
교미의 질서는 그저 쾌락만의 질서가 아니다
한참 웃다보면 다음과 같은 심각한 구절에 부딪치게도 된다.
그까짓 것 하고 짓밟지 말라
개똥벌레 하나 죽은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그런 식으로 생명을 다루지 말라
개똥벌레가 네 죽음을 보고
그까짓 것 하는 날에는
너도 큰일나는 날이다.
-'개똥벌레' 전문
그는 곤충을 만들어낸 조물주보고 익살스럽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도 웃어가며 시를 쓰고 싶다고 하는가하면 자기도 벌레 출신인데 살아가며 그 순수한 본능이 오염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곤충을 통해서 조물주의 익살스러움을 보았다. 송장벌레가 시체에 들어가 알을 까고, 사마귀가 교미 끝에 수컷을 잡아먹고, 여왕벌이 수만 마리의 새끼를 까고, 물자라가 수컷 등에 알을 백 개씩이나 까서 업어 키우게 하고, 저는 또 다른 수컷을 찾아가는가 하면,
어느 메뚜기에게는 날개도 다리도 목소리도 반쪽밖에 주지 않았다. 정말 엄청난 일을 하면서 자기 기량에 도취했을 조물주. 그는 분명 익살스러운 시인...이다. 나도 그이처럼 웃어가면서 시를 쓰고 싶다.
나는 벌레 출신인데, 나의 본능은 살아가면서 오염됐다. 윤리와 도덕, 그리고 질서와 양심, 교육과 교훈, 서적과 강의, 지시와 경고 등으로 오염됐다. 이제 나는 나의 솔직하고 순수한 나를 찾기 어렵다.
그 알뜰하고 간편한 본능을 내 몸뚱이에서 찾고 싶은데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퇴화하고 변질됐다. 그러나 아직 곤충에게는 내가 찾고 있는 본능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다행이다. 그 중에서 식(食)과 성(性)의 본능도 좋지만 고독에 대한 본능은 더 매력적이다.
-'후기'중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비교했을 때 질투와 시기, 혹은 열등이 쌓이기도 하지만 곤충과의 대조로 인간이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게 하는 그의 시집은 고독만으로 채워졌던 종전의 시의 형태와는 또 다른 점이 있어 이 가을을 심심하지 않게 한다. 더욱이 그는 섬세한 솜씨로 곤충의 생태를 그려놓고 있어 읽는 이들의 생기를 여름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개미와 베짱이]의 시집에는 평생 섬으로 섬으로 떠돌아 섬사람의 고독과 야생화의 고독과 인생을 조용한 울림으로 우리에게 되돌아보게 하는 시인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있다.
저자 소개
이생진
충남 서산의 바닷가에서 태어나 평생 섬으로 떠돌며 시를 쓴 시인이다. 그는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잘 알려져 있으며 「바다에 오는 이유」「섬에 오는 이야기」「섬마다 그리움이」「먼 섬에 가고 싶다」「하늘에 있는 섬」등 주로 섬에 관한 시를 많이 썼다.
그는 우리나라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섬사람의 고독, 심지어 야생화의 고독까지 시로 써낸 시인이다. 시인은 지금도 알려지지 않은 섬에서 고독한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이생진 [저]
서산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바다와 섬을 좋아했다. 해마다 몇 차례씩 섬으로 여행을 다니며 우리나라 섬의 정경과 섬사람들의 애환을 시에 담아내어 ‘섬 시인’, ‘바다 시인’으로 불린다. 1955년 첫 시집 [산토끼]를 펴내기 시작해 1969년 「제단」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시집 38편, 시선집 3편, 시화집 4편, 산문집 2편 등을 펴냈다. 1978년에 펴낸 대표작 [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바다와 섬과 사랑을 노래한 국내 시의 백미(白眉)”로 꼽히며 40년 넘게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1996년 [먼 섬에 가고 싶다]로 윤동주 문학상, 2002년 [혼자 사는 어머니]로 상화(尙火) 시인상을 수상했다. 2001년 제주특별자치도 명예도민이 되었고, 2009년 성산포 오정개 해안에 ‘그리운 바다 성산포’ 시비공원이 만들어졌으며, 2012년 신안 명예군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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