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자 에세이 선집. 시사성을 띈 글들이 적지 않다는 이유로 수필이 아닌 에세이 선집으로 명명하였다는 작가가, 남의 손에서 빌려다가 몇 편씩 골라 넣고 순서에 따라 세 편으로 나누어 편집하였다. 30년 가까이 써온 글들을 묶은 이 책은 긴 세월 동안 그 때마다 작가가 부딪힌 일들을 적힌 글들이 한 권의 선집에서 조화를 이룬다.
일상에서 느끼는 삶의 진실을 차분히 그려낸 에세이집
수필가이자 일문학자인 김효자가 에세이집 『두고 떠나는 연습』을 펴냈다. 신간은 작가가 70년대 월간 <수필문학> 재직 시절부터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써 왔던 에세이 중에서 대표작을 모은 것이다. 작가는 1978년 『그림 속의 나그네』, 1987년 『나의 만남 나의 사랑』 등 두 권의 수필집을 펴낸 바 있다.
이제 고희를 넘긴 작가가 펴낸 이번 신간은 흘러간 세월을 따뜻한 시선으로 모듬고, 그 속에서 발견한 삶의 진실을 차분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작가는 “복잡하고 긴 세월에 남달리 많은 변화를 체험하면서 그 때마다 부딪힌 일들을 가슴으로 맞받아 여과할 겨를도 없이 써 낸 단편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 자신의 글에 대해 “그때 그 시절, 하나하나가 내 속마음을 흔들어 준 나의 작은 진실이었으며, 더러는 맞부딪히고 더러는 손을 잡으며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소중한 것들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신간은 일상을 토대로 작가의 내면을 솔직하게 표현한 에세이이다. 어렸을 적 만났던 그리운 이들, 대학 때 스승을 비롯해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일상과 맞물려 새롭게 되살아난다. 평생 직장 생활을 하고 맞벌이하였던 자신의 경험, 두 아들을 키우며 느꼈던 자식 교육에 관한 이야기, 우리나라 여성의 삶의 대한 단상, 유럽과 일본, 극동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예술을 접하고 느낀 점들, 그리고 소박한 삶 속에서 자연을 벗하며 꾸밈없이 사는 인생의 단면 등을 수수하고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신간은 에세이 모음집으로 특별한 주제를 가지고 일관되게 쓴 글은 아니다. 하지만 인생의 선배로서, 때로는 이 땅의 평범한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느꼈던 일들을 가감없이 풀어내고 있다. 언제 어디부터 읽어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고, 한켠으로는 잔잔한 감동과 삶의 교훈을 안겨 준다.
신간은 ‘가을의 문턱에 서서’, ‘나의 만남 나의 사랑’, ‘80점짜리 훈장’ 등 3부로 나누어 총 70여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성들의 삶에 대한 단상
작가는 일상의 신변잡기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평범한 생활 속에서 느끼는 내면의 소리를 들려 준다. 공터 호박밭을 일구는 노인을 보며 작가는 ‘책상물림’이었던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린다. 가냘픈 벚꽃나무 묘목을 심으면서는 옛날 교편을 잡았을 때 무단 가출하여 일주일이나 방랑하다 돌아온 여중생 제자를 떠올리기도 한다. 말라 비틀어 죽을 것 같은 묘목이 새 잎을 파랗게 피우듯, 한때 방황했던 제자도 이제는 중년 고개를 바라보며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보살피며 어디에선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작가는 쓰고 있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삶에 대한 단상도 이어진다. 런던 템스 강 건너에 있는 선술집에서 자신에게 호의로 술을 따라주었던 신사의 행동을 보며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오랫동안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서구 선진국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의 여성들과도 달리 일본 여성이나 한국 여성들은 남자들의 친절에 익숙치가 못하다. 속으로야 어떻든 남자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 듣고도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살아왔기 때문에, 남자의 친절 앞에서 오히려 예사롭지 못하는 불안과 모욕감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리라.” (92-93쪽)
이어 작가는 “아기를 등에 업고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저만치 빈손으로 훨훨 앞서 가는 남편을 헐레벌떡 쫓아가고 있는 한국 여인의 풍속도가 측은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머리에 떠오른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작가는 ‘단상’이라는 글의 한 토막인 ‘한국 여성의 현주소’에서 무당집에 드나드는 여자들을 보며... 개탄해 마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마음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불안은 언제나 피동적 입장에서만 살아온 여성적 불안이다. 남자 대학생들이 장차 아내 될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가지는 않을 것이며, 중년의 사나이가 자신의 이혼 문제를 들고 일부러 무당과 상담하러 가지는 않을 것이다.
모 여자 대학 동창회 석상에서 남편의 직업과 직위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라는 교수의 요청에 따라 차례로 돌아가며 남편 PR만 하다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로지 남편들의 후광에 의해서만 찬란히 빛나기도 하고 덜 빛나기도 했을 그 자리의 붉으락푸르락한 광경을 나는 눈으로 보는 듯했다.” (99-100쪽)
작가는 “좋든 굳든 인간이 확실히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말하며 우리 나라 여성들의 실존적 자각을 촉구하기도 한다.
신간은 화려하지 않다. 평범하고 소박하다. 과장되지 않고 젠체하지도 않는다. 작가는 명문대를 나와 대학 교수를 지낸, 겉으로 보면 남들보다 곱게 살았을 것 같은 인생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변두리 저지대의 셋집에서 발을 빼려고 아등바등해야 했고, 남편이 사업을 시작하면서는 오랫동안 자금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평생 맞벌이하며 돈 걱정을 해야 했고, 억척스럽게 두 아들을 키워야 했던 평범한 이 땅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에세이는 우리의 가슴에 남고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계절로 치면 여름을 지나 인생의 가을 문턱에 서 있다는 작가는 표제작 ‘두고 떠나는 연습’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냉정한 사람이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나는 그를 향해 늘 상냥하게 웃는데도 나를 차다고 말한다. 한 가지 작은 일에서 다른 한 가지 일로 마음과 몸을 회전시킬 때도 적잖은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정착과 안정을 갈망하는 속성을 가진 여성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끊임없이 체념하고 끊임없이 포기하는 생활의 연속 속에서 나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아주 떠나 버리는 연습,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보내는 연습을, 빈 손이 되는 연습을 조금씩 조금씩 해 왔는지 모른다. 세상이 불안할 때, 가진 것을 손에 움켜쥐느라고 안간힘할 것이 아니라 손을 펴고 갈 것은 다 가라고 놓아 줄 수만 있다면, 우리의 빈 손에는 평화와 자유가 그득 담겨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 자유는 언제나 고독을 벗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월이 우리를 두고 거침없이 흘러가 버리듯 우리도 머지 않아 모든 것을 남겨 두고 거침없이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우선 이 작은 종점에 무사히 와 닿은 데 한시름 놓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52-53쪽)
▷작가의 말
에세이 또는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72년 3월, 월간 수필문학(발행인 김승우)이 창간되면서였다. 1978년에 처녀 수필집 『그림 속의 나그네』를 관동출판사에서 출간하고, 그 후 9년만에 두 번째 수필집 『나의 만남 나의 사랑』을 어문각에서 출판했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더 흘러 70고개를 넘기면서, 안팎으로 바쁘게 사느라고 미처 치우지 못했던 것들을 과감하게 정리하여 하나하나 종지부를 찍어 가야겠다고 생각하다 보니,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그 동안 대책 없이 쌓여온 내 글이 찍힌 종이 쪼가리들이다. 그냥 확 쓸어다가 태워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듯 글쓴이 자신으로부터 어지간히 푸대접을 받아온 글들이라 생각하니, 그저 마음이 아리다.
그래도 손에 집히는 대로 읽어 보니, 나름대로 그 하나하나에서 내 마음속에 찍힌 그림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느꼈으며, 그것을 굳이 글로 쓰게 되었던지, 속내가 무엇이었는지, 남들이야 속속들이 알아 주지 못하더라도 나에겐 흘러간 세월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로 느껴진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살지 알 수 없으나, 나 자신을 위해서 수수한 옷을 입혀 그 중의 얼마간을 간직한다 한들 큰 사치는 아니겠지 하는 생각에서 여기 에세이 선집을 간행하기로 한다.
수필 선집이라 하지 않고 굳이 에세이 선집이라고 한 것은 나의 글이 한결같이 순수 문학적인 글이 되지 못하고, 대부분 긴 세월을 두고 여러 신문 잡지의 청탁에 의해 쓴 글들이므로 시사성을 띈 칼럼류의 글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내 서가에 이미 간행된 내 수필집이 한 권도 없는 것도 아쉬워서 남의 손에서 빌려다가 몇 편씩 골라 넣고 순서에 따라 세 편으로 나누어 선집으로 편집하게 되었다.
이 책에 뽑힌 글들의 연륜이 줄잡아 30년, 그 사이에 사회적으로는 정부가 여러 차례 바뀌었고, 나 자신은 미국과 프랑스의 도서 박람회 나들이를 끝으로 언론사에서 대학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 후로 일본 도쿄대학의 연구교수, 러시아 극동대학의 교환교수 등 해외에 나가 있던 세월도 짧지 않았다. 월간 수필문학지 재직 시절에 초등학생이던 두 아들은 어른이 되고, 손녀 손자들이 새로 태어나 모두 중·고생으로 자랐다.
그 복잡하고 긴 세월에 남달리 많은 변화를 체험하면서 그 때마다 부딪힌 일들을 가슴으로 맞받아 여과할 겨를도 없이 써 낸 단편적인 글들이 한 권의 선집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 한편 불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 때 그 시절, 하나하나가 내 속마음을 흔들어 준 나의 작은 진실이었으며, 더러는 맞부딪히고 더러는 손을 잡으며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소중한 것들이 되었다.
이제는 나의 모자람까지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조용히 관망해도 될 나이에 이르렀다. 그래서 스스로 제 마음과 몸을 추스를 수만 있다면, 나의 노년은 더욱 보람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물려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처지라,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과 오랜 세월을 두고 내 살아온 길을 가까이 지켜보아 준 친구들을 생각하며 이 선집을 출간한다.
♧ 저자 소개
지은이 김효자
수필가·일문학자.
1932년 전남 영암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 일어과 대학원에서 일본 고전문학을 전공하였다. 정신여고와 서울여상 국어과 교사를 지내고, 월간 수필문학 편집인 겸 주간을 역임하면서, 「현대문학」, 「월간문학」, 「수필문학」 등에 많은 수필을 발표하는 한편, 수필가 찰스 램과 데라타 도라히코의 작품을 번역 소개하였으며, 1980년 한국수필문학진흥회가 수여하는 제3회 수필문학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경기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본 고전문학 및 고전극 노가쿠(能樂)의 연구에 주력하여 여러 논문과 저술을 발표하였으며, 일본 도쿄대학 연구교수, 러시아 극동대학 교환교수를 역임하였다. 1997년 경기대 교수를 정년퇴임한 이후 모스크바대학 한국학센터 연구교수로 부임하여 한국 문학의 해외 소개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 수필집 『그림 속의 나그네』(1978), 『나의 만남 나의 사랑』(1987), 일본연구총서 『일본 문학의 이해』(2001, 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 『일본 민속의 이해』(1981),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소설 『침묵』(1982), 이양지(李良之)의 소설 『내의(來意)』(1985), 제아미(世阿彌)의 『풍자화전(風姿花傳)』(1993, 사상총서) 등이 있다.
1. 가을의 문턱에 서서
주근깨 ... 12
아버지 ... 14
울타리 ... 17
묘？遲？ 심고 ... 20
(하략)
2. 나의 만남 나의 사랑
명무전 ... 112
터키 문명전 ... 117
시라이시 카요코의 세계 ... 121
미야라비 ... 126
(하략)
3. 80점 짜리 훈장
외손 ... 200
친구 ... 203
관상쟁이 이야기 ... 206
신도시 안산 풍경 ... 211
(하략)
김효자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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