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문예중앙』으로 등단한 시인 박세현의 첫 산문집「설렘」. 이 책은 시인이 가지고 있는 감성에 화려하지않은 문체를 통해 일상의 여백과 생각을 담아냈다. 또한 시를 가르쳤던 기억을 통해 시에 머물러 있는 단상과 열정, 순수성과 순정을 보여준다.
《설렘》은 '예술가들'과 '시를 지망하는 K부인에게', '눈앞이 길이다' 3부로 나눠 일상의 사사로운 일들과 그 속에 담긴 숨 쉴 공간, 생각할 틈을 통해 진정성과 넉넉함을 담아냈다.
시인 박세현의 첫 번째 산문집 〈설렘〉을 펴낸다. 1983년 제1회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공모 시 부문에 당선되어 지금껏 활발한 시작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이번 산문집을 통해 욕심내지 않는 글쓰기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한 글이 아니어서 그 색은 어둡고 칙칙한 회색에 가깝다. 이는 글쓴이인 저자를 살핌과 동시에 나를 돌아보게 하는 여백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 틈이 곧 숨구멍일 수 있다는 사실은 책 곳곳에 나의 생각들이 틈틈이 메모되어 있음이 증명한다.
또한 교조적인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다. 이 책은 전체가 총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2부를 채우고 있는 것이 그의 시론이다. ‘시를 지망하는 K부인에게’라는 제목 아래 그가 펼쳐 보이고 있는 시론은 말랑말랑한 산문성을 자랑하는 시에 가깝다. 글의 어떤 순서나 흐름을 생각해서 페이지를 따라 읽을 필요가 없다. 그냥 내키는 대로 펼쳐 읽다 보면 일상에서의 사사로운 일들 속에 시를 발견하는 수고, 거기 시가 있다는 걸 그가 일러주고 있다.
“그러나 K부인
시를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시는 첫사랑 같은 두근거림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첫사랑?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라는 설도 있지요. 모든 일의 첫 번도 시가 되지요. 시가 삶의 전부이고 지고요 지순이어야 한다는 말씀. 써놓고 보니 낯이 간지럽습니다. 우리 시대에 그런 순결성을 기대한다는 것이 물정 모르는 순진이라는 것쯤 나도 알 만하지요. 그러면서도 내가 갖기는 버겁고, 남 주기도 아까운 시가 지금 내 앞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안고 뒹구는 것, 뒹굴다 보면 옛정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애틋함만 눈 뜨고 있는 그런 사랑의 방식, 형태 꼭 그만큼의 시를 나는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개떡 같은 시, 너 없이도 잘 살 것 같아 날마다 이혼하지만 맥없이 또 보따리 다시 풀게 하는 그런 시가 날마다 내 앞에 있습니다.” -〈시를 지망하는 K부인에게〉 중에서
그가 천생 시인이라는 것은 시를 말하지 않아도 시에 머물러 있는 그의 단상들에서 또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또 때로는 아주 먼 거리에서 시를 탐하고, 그럼에도 자신을 몰라주는 시에 독을 품고, 그러나 이도 아주 어린 소년의 순정 같은 것이어서 곧 토라진 자신이 스스로 돌린 등을 풀고 시에 가 안기는 순수성, 이러한 치열한 열정이야말로 그를 계속 시인으로 불리게 하는 힘이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세현의 〈설렘〉은 또 한 권의 시집 아닌 시집일 테다.
서문
제1부 예술가들
예술가들
도착하지 않는 마흔
설렘
소망
숨쉬기 좋은 원주의 명소
갓 일곱시
양다리
시집 읽기
어느 인문주의자의 고별 공연
소멸의 의식
닭똥 냄새
작가의 존재 방식
나의 지병
시인의 명함
마종기
외롭지 않은 척
명왕성의 전락
개인의 힘
혼자 사는 재미
첫 시집
저 들판 속으로
자존심
저 산이 문학을 키웠소
시의 자리
낙(樂)
공공의 적
사경을 헤매던 시절
소낙비 같은 시
계약 재배
뜨거운 안녕
나를 중얼거리다
제2부 시를 지망하는 K부인에게
!!!
제3부
제천 길
단양길
풍기 길
부석사 길
봉화길
어떤 시인이 큰 시인을 친견하고 하룻밤 묵으며 가르침을 받기를 청했습니다.
“상(相)이 있는 사람은 여기서 잘 수 없다.”
“저는 등단했고 시집도 몇 권 냈기에 상이랄 게 없습니다.”
그러자 큰 시인은 씩 웃으며 불렀습니다.
“시인님.”
“예.”
“등단한 지 몇 년이 되었는고?”
큰 시인은 또 물었습니다.
“자네, 시는 열심히 쓰고 있는가?”
“네, 등단한 이래로 지금까지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상을 수상한 적이 있는가?”
“아직 그게 없어 속 상합니다.”
“그것이 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네는 여기서 잘 수 없다.”
-p178-179 〈시를 지망하는 K부인에게〉 중에서
박세현 [저]
1953년 강릉에서 태어나 관동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국문과에서 석사 및 박사과정을 공부했으며, 1983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했다. [헌정] [본의 아니게] [사경을 헤매다] [치악산] [정선아리랑] [길찾기] [오늘 문득 나를 바꾸고 싶다] [꿈꾸지 않는 자의 행복] 등의 시집과 산문집 [시만 모르는 것] [시인의 잡담] [설렘] 및 연구서 [김유정의 소설세계]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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