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동네 시인선 129권.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윤정구 시인의 신작 시집 『한 뼘이라는 적멸』이 출간되었다.
윤정구 시인의 시어는 “맨 처음의 공무(空無)”를 염원하면서 동시에 “까마득히 숨은 별”을 열망한다. 근원으로 되돌아가거나 세속을 초월하려는 시인의 곡진한 의지는 거대한 관념에 쉽게 포섭되지 않는다. 물소리, 뼈피리, 산수유, 폭포, 지렁이, 후박나무… 시인은 현대인들에게는 더없이 무가치한 이 구체적 자연의 사물들을 호명해, 그 속에 깃든 신을 읽어내고 “등허리에 푸른 별빛을” 지듯 푸른 날개를 달아준다. 윤정구 시인에게 시는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 결핍과 절망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세상 절망 밑에는 희망이 돌고” 있음을 각성시키려는 구도자의 역할을 떠안아야 한다.
해설을 쓴 이병철 평론가에 따르면 “윤정구의 시를 떠받치는 힘은 시인으로서의 자의식과 그 자의식이 지향하는 숭고한 정신성”이며, “그의 시에는 닿을 수 없는 높이를 향해 오르려는 무모한 영혼, 척박한 골짜기에 자시 자신을 유폐시킨 고독한 영혼이 있다.” 우리는 시인이 가리키는 “거기 빛나는 ‘설청의 시’로 눈을 씻”고, 속세의 경쟁과 탐욕이 아닌 우리의 시작과 끝, 근원과 초월을 사유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게 된다.
시인의 말
제1부
수렴동 물소리 13
한 뼘 14
산수유 화엄 15
점안(點眼)의 시법(詩法) 16
토정비결 18
단적(短笛) 19
공무(空無)의 바다 20
복음 22
각다귀 고신첩(告身帖) 23
성불(成佛) 24
승천 26
수매미는 알지 못한다 27
닥나무 숲속의 우물 28
불가사의경(不可思議經) 29
몽생화(夢生花) 30
요 요런, 사람 같으니라구 32
제2부
손가락 끝에 뜬 달 35
다시 봄, 너구동 36
소심(素心) 37
들리지 않는 노래 38
다산초당의 노을 40
천마(天馬) 41
외로운 수탉을 위하여 42
황양목 44
구오복일왈수(九五福一曰壽) 45
비파형 동검 46
군자란 48
운주(雲住) 49
사과는 예정대로 50
하늘다람쥐 가는 길 51
하루살이 춤 52
제3부
이병률(二甁律) 이야기 55
일별(一瞥) 56
히이힝, 권진규 57
한 식구 58
시인이란 이름의 민물고기들 59
은하수, 한 뼘이라는 적멸 60
초저녁별 62
홍도 63
흰 옷 입은 아이 64
열반암(涅槃岩) 66
마부를 따라가다 67
비잔티움 68
호랑나비 70
첫사랑 71
하늘공원 72
만천성(滿天星) 74
수레바퀴를 넘다 76
제4부
어머니 마음 79
설청(...雪晴) 80
풍탁(風鐸) 82
가파른 저녁 83
대덕산 숭어 84
아득한 풍경 86
봉숭아꽃 87
나마스테 88
당진 이모부 90
신전 앞에서 92
고깔제비꽃 93
독락당(獨樂堂) 오르는 길 94
마리안느 96
허허실실 97
아버지의 아버지 98
단 한 번만이라도 100
해설 | 높이 솟구쳐 나는 설청(雪晴)의 시 101
이병철(시인·문학평론가)
마음에 들면 두말없이 따라나서는
수렴동 물소리
오늘은 한 이백 리 내 집까지 따라와
함께 달을 보네
박꽃 지붕으로 내리는 달빛
차르르르, 청옥구슬로 흐르는
수렴동 물소리 깊고 깊어서
어둑새벽 훤히 열리도록
발이 시리다
-「수렴동 물소리」 전문
간혹 인물화에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았던 화성(畵聖) 고개 지(顧愷之)는 아무리 하찮은 사물에도 다 신이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대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면 사물에 깃든 신을 만나 야 한다고 여백은 빈 공간이 아니라 가능성의 힘들이 뭉쳐 있는 유현(幽玄)한 공간이라고
설령 폭포가 떨어지는 깊은 골짜기에 들어갔을 때 가슴이 갑자기 벅차오르고 기가 차오름을 느낀다면 멈추고 서서 폭 포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이우환의 움직이는 점과 마주 섰을 때도 마찬가지다 점과 점들이 서로 당기고 밀어내는 균형과 불균형의 접점이 느껴진다면 그게 바로 신의 숨결 아니겠는가
그대 가슴속 만 가지 느낌과 뜻도 획 하나로 담아낼 수 있다고 그 획 하나에 모든 우주의 기를 모아 정신을 곧바로 하늘을 향하여 세울 수 있다지만
낙관을 찍어 자신이 점안한 것임을 보증하던 옛사람처럼 시여, 내가 눈을 찍어 세상에 내보내어도 여전히 청맹과니인 시여 답답한 내 시여
-「점안(點眼)의 시법(詩法)」 전문
눈 오신 날 대나무 숲길을 걸으면
오래 뵙지 못한 한 어른이 생각난다
겨울 새싹같이 여린 내 시를 읽고
천 리 밖에서 전화를 해주셨던 그 어른
얼마 후인가, 그분의 서실에 들렸다
그때 눈이 왔었다?
함께 시인의 산소가 있는?
햇빛 반짝이는 대나무 숲길을 걸었다
처음 설청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시 정신의 끝머리였으리라?
세상이 하얀 절망에 뒤덮이더라도?
그 속에서 푸른 희망을 보아내야 한다고
그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책임이라고
그러고 보니, 모든 흰색에는 푸른빛이 돌았다
눈 쌓인 벌판에도?
어머니 다듬질하신 옥양목에도
사랑방 경상 위 장형의 미농지에도
자세히 보면 푸른 기운이 꿈틀거렸다
세상 절망 밑에는 희망이 돌고 있다
-「설청(雪晴)」 전문
윤정구 [저]
경기 평택에서 출생,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대산문화재단 창작지원을 수혜받았으며 수주문학상, 문학과창작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시천지', '우리시' 동인과 한국시인협회,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고, 시집 '눈 속의 푸른 풀밭''햇빛의 길을 보았니'와 산문집 '한국 현대 시인을 찾아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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